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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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承文祖 追慕記(승문조 추모기)

 

어찌 事緣(사연)이 없었겠습니까. 어찌 風浪(풍랑)이 없었겠습니까.

언제나 햇살 맑은 鳳城 墓園(봉성 묘원)에서 바라보는 한라산은 무심한 듯 서있고 먼지 쌓인 族譜(족보)는 사람의 손길을 내내 그리워합니다.

시대가 변하고 春秋(춘추)는 야속하게 흐르는데 우리들의 先祖(선조)에 대한 마음은 風霜(풍상)을 견뎌낸 墓碑(묘비) 만큼이나 삭아만 가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무지라 할지 철없다 할지 돌이켜보면 朝鮮 中宗(조선 중종) 14년 己卯年(기묘년)의 禍(화)를 5세기나 흐른 지금 알 길은 없다지만 한양을 등지고 바다 건너 낯설고 거친 耽羅(탐라)의 流杯(유배)길에 모시적삼 눈물로 적셨음은 누구라도 가히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이제 入島(입도)한지 오백년이 지나 세상도 변하고 사람도 바뀌면서 조상을 모시는 방법도 점차 달라져갑니다.

 

저희 孝寧大君 玄孫 承文祖系 宗親會(효령대군 현손 승문조계 종친회)에서도 올해야 비로소 宗親(종친)의 오랜 宿願(숙원)이던 門中墓域(문중묘역)을 조성하고 도내에 산재했던 先祖(선조)들의 墓(묘)를 한 곳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오로지 이는 公(공)의 숨결과 피로 이어진 연이며 조상대대의 어른들의 소매의 깃든 눈물과 도포에 젖은 땀의 결과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늦게나마 드디어 가슴에 푸른 하늘을 품고 대지에 깊은 정을 묻으면서 바람은 노래처럼 구름은 발걸음처럼 후손들에게 축복을 내려주심에 머리 숙여 예를 올립니다.

 

承文祖(승문조)께서는 朝鮮 太宗大王(조선 태종대왕)의 차남 孝寧大君(효령대군)의 장남인 誼城君(의성군)의 孫(손)으로서 大君(대군)의 4세인 儒城君(유성군)의 4남으로 태어나 己卯士禍(기묘사화)를 계기로 제주도에 입도하여 濟州牧 禾北里에 平居(제주목 화북리에 평거)하였습니다.

입도 이래 6, 7세를 독자로 내려오다 8세에 이르러 장남 順豪祖(순호조)(지금의 귀덕 일족)와 차남인 順南祖(순남조)(지금의 광령 일족)로 나뉘었고 順豪祖(순호조)는 다시 14세인 彦凡祖(언범조)까지 독자로 대를 이어 15세인 會新祖(회신조)에 이르러 3형제로 분가하여오늘의 귀덕과 대정일대의 親族共同體(친족공동체)를 형성하였고 順南祖系(순남조계)는 13세 東彰祖(동창조)까지 독자로 대를 이어 14세인 命臣祖(명신조)에 이르러 3형제로 분가하여 현재 광령 일대의 親族共同體(친족공동체)를 형성하였습니다.

 

承文祖(승문조)께서는 예컨대 우리에게 있어 한 그루의 큰 나무였습니다. 나무는 늘 자리를 지키고 때로는 그늘이 되어 주셨으며 때로는 바람을 가리어 沃土(옥토)를 만들어주셨지만 歲月(세월)은 야속하게도 五百年 肉身(오백년 육신)을 한 줌의 흙으로 남겨 놓았을 뿐이었습니다.

 

종친들은 육지부에 先系(선계)와의 連繫(연계)가 단절되었던 뿌리 찾기를 시도하기에 이르렀고 많은 방법을 모색했으나 여의치 않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더군다나 명확한 자료나 문건조차도 존재하지 않았기에 어려움은 더욱 커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도 선조로부터 全州李氏 孝寧大君의 玄孫(전주이씨 효령대군의 현손)이라는 오래고 낡은 文獻(문헌)만이 다행히도 기록보존 유래되어 이것을 기반으로 수차례의 서초구 방배동의 淸權祠(청권사)를 방문하여 誼城君 世譜(의성군 세보)를 제시하고 대조하여 入島祖(입도조)가 다름 아닌 訓鍊院奉事承文公(初諱 承貞)(훈련원봉사 승문공(초휘 승정)임을 확실히 하였으며 또한 경기도 포천의 慕敏齊(모민제)를 찾아 誼城君(의성군)의 世譜(세보)와 대조하여 일치하였고 드디어 入島 始祖(입도 시조)인 承文公(승문공)이 誼城君(의성군)의 曾孫(증손)임을 재차 확인하기에 이르러 육지부와의 교류의 디딤돌을 놓게 되었습니다.

 

이로서 公(공)께서의 은덕과 조상들의 보살핌으로 그동안 소원하였던 2021년 初夏(초하)에 지금의 애월 땅에 門中墓域(문중묘역)을 조성하여 새롭게 선조들을 奉養(봉양)하기에 이르게 됨을 모든 종현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2022년 06월

효령대군 22세손(승문조 18世손) 병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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